조선의 대외 관계
조선은 건국 초 요동 정벌을 추진하여 명과 갈등을 겪기도 하였으나 태종 이후 사대교린의 외교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였다. 조선은 명에 대해 기본적으로 사대 정책을 유지하여 명은 조선왕을 인정해 주고 조선은 명나라에 정기적 부정기적으로 사신을 파견하면서 조공을 바치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조선은 사대 외교를 통해 국내적으로 왕권을 안정시키고 대외적으로 동아시아에서 국제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또 명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수입하고 공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득도 취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주적이면서 실리적 성격을 지닌 외교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사대교린 정책 : 조공 관계로 맺어진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 나타난 외교 정책이다. 서로의 독립성이 인정된 바탕에서 이루어졌으므로 예속 관계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은 영토의 확보와 국경 지방의 안정을 위해 태조 때부터 두만강 지역을 개척하기 시작했으며 세종 때에는 최윤덕과 김종서가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에 4군과 6진을 개척하여 오늘날의 국경선을 확보하였다. 이후 조선은 여진족에 대해 회유와 토벌의 양면책을 시행하였다. 그리하여 귀화해 오는 여진인에게는 관직과 토지를 제공하였으며 사절의 왕래를 통한 교역과 국경의 무역소를 통한 국경 무역을 허락하였으나 국경을 침범하여 약탈하는 여진족은 군사적으로 응징하였다. 한편 삼남 지방의 일부 주민을 북방으로 이주시켜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 지역을 개발하는 사민 정책을 실시하였고 이 지역의 토착민을 토관으로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하고자 하였다.
일본과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해서는 교린 정책을 원칙으로 하면서도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수군을 강화하고 화약 무기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노략질에 어려움을 느낀 왜구들이 평화적 교역을 요구해 오자 조선은 일부 항구를 개방하여 제한된 무역을 허용하였다. 하지만 왜구의 약탈이 사라지지 않자 세종 때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 섬을 정벌하고 교역을 중단하였다. 이후 일본이 다시 교역을 요청하자 쓰시마 도주와 계해약조를 맺고 부산포, 염포, 제포의 3포를 개방하여 교역을 허용하였다. 이 시기 일본의 막부 정부는 조선에 국왕사를 파견하였고 조선은 일본에 통신사를 보냈으며 쓰시마 섬을 통해 조공 형식으로 교역하였다.
※ 쓰시마 섬 정벌 : 세종 원년 이종무는 병선 227척, 병사 1만 7천여명을 이끌고 쓰시마 섬을 토벌하고 왜구의 근절을 약속받았다.
임진왜란 전의 상황
16세기에 들어와 일본인의 무역 요구가 늘어났으나 조선 정부의 통제가 강화되자 중종 때 3포 왜란, 명종 때 을묘왜변 같은 소란이 일어났다. 이에 조선은 비변사를 설치하여 군사 문제를 전담하게 하고 일본에 사신을 보내 정세를 살펴보기도 하였다. 이후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시대를 수습하고 통일을 이룩하였다. 그는 일본 내에서 여전히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다이묘와 신흥 세력의 불만을 대외로 돌리고 국내 정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대륙 침략을 도모하였다. 게다가 왜구로 인해 명과 일본의 공식 무역이 차단되면서 경제적 어려움마저 가중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명을 정벌하는 길을 빌려달라고 요구하였는데 조선이 이를 거절하자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 3포 왜란 : 1510년 부산포, 제포, 염포에 거류 중인 왜인들이 폭동을 일으킨 사건이다. 삼포를 개항한 이래 왜인들의 무역과 거주가 급격히 늘자 조선 정부는 계해약조를 들어 이를 엄격히 통제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거류 왜인들이 부산 첨사를 죽이는 등 난동을 일으킨 사건이다. 조선 정부는 3포를 폐쇄하고 거류 왜인을 쓰시마 섬으로 내쫓았다.
※ 을묘왜변 : 1555년 전라남도 해남군의 달량포에 왜구가 70여 척의 배로 쳐들어온 사건이다. 조선 정부가 왜인들의 왕래와 상품 거래를 제한한 데 대해 불만을 품고 쳐들어왔으나 조선군에 패하여 쫓겨났으며 일본과의 교류가 일시적으로 단절되었다.
임진왜란의 전개
임진왜란 이전 조선은 장기간의 평화로 군역 제도가 문란해지고 국방력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20만 대군으로 침략해 오자 20일도 되지 않아 한양을 포기하는 등 연전연패를 당했다.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임시 조정을 이끌게 하면서 의주까지 피난하여 명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전쟁 초 왜군은 육군의 북진과 함께 수군이 남해와 서해를 돌아 물자를 조달하는 수륙 병진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전라도 지역에서 이순신이 이끈 수군이 옥포 해전에서 승리한 후 연승을 거두면서 일본의 수륙 병진 작전을 좌절시켰고 육지에서도 자발적으로 조직된 의병이 지리적 이점을 살린 전술(매복, 기습, 위장 등)로 왜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게다가 명이 전쟁에 참전한 후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고 권율이 행주산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자 명과 일본 사이에 휴전 협상이 진행되었다. 한편 조선은 전쟁 중 군대의 편재를 바꾸어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지방에서는 속오법을 실시하면서 조총과 같은 무기도 보강하여 왜군을 격퇴할 준비를 하였다. 명과 일본 사이에 휴전 협정이 결렬된 후 정유재란이 일어났으나 조·명 연합군이 직산 전투에 승리하여 왜군의 북진을 차단하고 이순신이 명량 해전에서 왜군을 대파하자 전세가 불리해진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이후 군대를 본국으로 철수하였다.
※ 임진왜란 3대 대첩 : 이순신이 지휘한 한산도 대첩, 김시민이 지휘한 진주 대첩, 권율이 지휘한 행주 대첩
임진왜란의 결과와 영향
7년 동안 전개된 임진왜란으로 조선뿐 아니라 동아시아 정세도 급변하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이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해지고 인구가 급감하여 국가 재정이 매우 어려워졌다. 정부는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공명첩을 대량으로 발행하였는데 이는 조선 후기 신분 질서가 붕괴하는 원인이 되었다. 또 불국사, 경복궁, 조선왕조실록 등 많은 문화재가 불타거나 약탈당했고 많은 사람이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다. 군사 기구였던 비변사는 임진왜란으로 기능이 확대되었고 중앙군으로 훈련도감이 설치되고 속오법이 시행되었다. 조총, 담배, 고추, 호박 등이 조선으로 전래되었고 '이몽학의 난' 등 민란도 발생하였다. 조선의 둘러싼 대외 정세도 변하였다. 일본에서는 에도 막부가 성립되고 조선에서 포로로 끌어간 기술자(도자기공, 인쇄공)나 성리학자를 통해 문화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명은 조선에 원병을 파견하면서 군사적·경제적 부담을 지게 되어 국력이 약화되었다. 만주에서는 조선과 명이 전쟁으로 약화된 틈을 타 여진족이 후금을 세우고 급속하게 성장하여 명·청 왕조 교체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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